#선교적 성경 해석학
<각장의 나름 다가오는 문장> 김종수
선교적 성경읽기의 역사와 개관 _ 마이클 고힌
계몽주의의 이론-실천(theoriapraxis) 이분법에 예속된 신학 기관에서, 선교는 보다 이론적 신학 분과가 가진 복합적 엄밀함과 동떨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하비콘(Harvie Conn)은 이렇게 한탄한다. 실용적인'(practical) 미국인들은 선교를 '실천신학'(practical cheology) 안에 위치시켜 왔다. 기본적으로 '신학의 위대한 네 분과'는 여전히 구약학, 신약학, 교회사, 교의학이다. 그리고 선교는 여전히 신학이라는 '위엄 있는 대저택' 뒤에 가려진 공구 창고의 모습을 하고 있다." 21
선교는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의 사랑에 근원을 둔다. 아들은 그분의 교회가 하나 되고 그분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힘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선교를 계속 이 가도록 교회를 보내시며, 바로 이 보내심이 선교의 본질 자체를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의 선교는 성경 이야기의 내러티브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창조 세계 전체와 온 열방 백성 전체를 인간의 반역이 가져온 피폐한 영향력에서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은 이 선교에서 역할을 감당할 한 백성을 선택하셨다. 26
선교적 해석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세상과 모든 민족의 백성을 회복 하시는 그분의 선교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의 일부가 될 한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역사적 내러티브안에서 드러난다. 중심 요점은 다음과 같은데, 선교적 해석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우주적 회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특정한 한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이라는 단어와 백성이라는 단어 둘 다 중요하다.
성경 이야기의 방향은 한 백성에서 모든 민족으로 향한다. 교회는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이동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움직임 안에 붙들려 있다. 36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이야기에 참여하라는 소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목적에 따라, 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선교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이 외부인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는 활동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선교의 이후 단계에 포함되지만 말이다. 오히려 선교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한 부분을 감당하는 백성 전체의 사명이다. 44
선교적 만남이란 서로 다른 포괄적 삶의 비전들이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포괄적 주장들은 다른 삶의 비전들이 신앙하며 헌신하는 근본 전제와 총체성 주장에 도전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삶의 방식을 요청할 것이다. 과거에는 복음이 너무 자주 삶의 사적 영역으로 물러나 있었고, 교회는 더 넓은 다원주의적 삶의 비전 안의 한 자리를 온순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선교적 만남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대안적이고 포괄적인 삶의 비전을 회복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적 만남이 되어야 한다. 즉, 강압적인 것이 아닌 삶의 매력이 주는 설득력 있는 관심이어야 한다.46
성경 해석을 위한 해석학으로서의 선교_리처드 보컴
선교적 해석학은 세상에서 선교 중인 교회를 대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우리의 특정한 탈기독교 사회에서 하나의 대항 문화 운동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살아 내고자 하는 이들이 (단지 선교적 해석학의 청중뿐 만 아니라) 그것의 대화 상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선교적 해석학은 서구 교회가 그들이 한 세계 여러 지역의 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선교적이라고 간주하던 의미에서 선교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55
하나님의 백성은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지만, 지리적 중심에서 지리적 주변부로 움직이지 는 않는다. 원심 운동과 구심 운동의 두 이미지가 지니는 영속적 가치는, 다른 모든 인간의 삶처럼 언제나 지리적 배경을 갖기는 하겠지만, 어떤 특정 한 지리적 위치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권한을 부여받고 공동체 내부에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타자들을 향해 나아가는 개인들도 필요하고, 함께하는 삶과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드러내는 공동체도 필요하다. 선교 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핵심에 다가서는 증인의 모습은 이 두 측면을 초월한다. 65
선교적 해석학 대화의 지도 그리기 _ 조지 훈스버거
선교적 해석학이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경향을 비판한다고 확신한다.
1. 우리는 (고대의 성스러운) 본문을 대상으로, 우리를 주체로 여기는 경향을 물려받는다. (반론질문) 만약 성경이 행동 주체라면? 만약 우리가 이곳에 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라면?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다른 학생, 즉 제자로 만들기 위한 성경읽기를 의도하신다면?
2. 우리는 본문이 최초에 무엇을 의미했는지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결정한다. (반론질문) 만약 성경이 우리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면? 만약 성경이 우리워 가장 기본적 전제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헌신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만약 성경이 우리의 소망이 잘못된 곳을 향해 있다고 판단하고, 우리를 위 한 새롭고 살아 있는 소망을 결정한다면?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읽는다면?
3 우리는 대체로 개인적 측면에서 해석과 적용을 생각한다. (반론질문) 성경이 각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 말하고 있다면? 만약 그 본문이 가리키는 초점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와 그렇게 부름받은 공동체의 일부로서의 각 구성원이라면? 78-79
공동체의 선교적 위치에서의 상상 질문들 95
* 우리의 본문 읽기는 우리의 전제와 사각지대를 도전하거나 정화하는가?
* 본문은 행실뿐만 아니라 의도성과 동기에 관해서도 그리스도인의 적절 한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돕는가?
* 우리의 읽기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드러내는 자기 비움과 십자가 희생의 특징을 배제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를 강조하는가?
* 이 본문은 어떤 방식으로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갇힌 자 를 놓아주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우리가 그것을 좋은 소식으로 듣는 것을 어떻게 어렵게 만들 수 있는가?
* 우리가 이 본문을 읽는 방식은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죄에 대한 우리의 공모와 책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가?
* 이 본문은 우리의 세상, 우리의 국가, 우리의 도시, 우리의 마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을 어떻게 명확하게 보여 주는가? 그리고 우리 는 그러한 목적에 어떻게 개입하도록 부름받았는가?
신학적 해석과 선교적 해석학 _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우리 시대의 아나뱁티스트 교회론에서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창조론과 창조 세계의 회복으로서의 구원론의 결핍은 선교와 성경 해석에 대한 시각을 손상시킨다. 그것은 어떤 자연/은혜의 이분법이 그림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데, 나는 이 점이 성경과 선교에 대한 보쉬의 이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하고 싶다. 신학적 해석을 살펴본 뒤, 우리는 이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120
교회의 삶이 성자와 성부의 선교에 연결되고, 그것에 의해 조명되는 심오한 방식에 대해 주의를 끌고 있다. 그러나 은유의 중심에는 우리가 예수님이 보냄받은 것과 같이 보냄받지 않는다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성자가 아니며, 우리를 보내신 것의 의의와 내용은 여러 면에서 성자를 보내심과 관련된 것들과 다르다. 나의 결론은 선교적 해석학이 너무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성경의 선교적 모티브와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저 선교적인 분으로 '축소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역시 전적으로 선교의 렌즈를 통해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선교적 해석학을 신학적 해석학 혹은 신학적 해석의 하위 범주로 보도록 제안한다.126
상호 문회적 헤석학과 선교적 신학의 형태 _ 존 프랭키
상호 문화적 해석학은 성서학, 신학, 문화인류학, 선교학의 학문 간 대화 의 결과다. 이 해석학의 핵심 통찰은 근본적 맥락성(radical contextualicty)이다. 즉, 모든 인간 담론은 그것이 출현한 사회적 배경에 내재되어 있으며, 전적 으로 사회적 배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139
나는 선교적 신학이 상호 문화적 해석학과 선교학, 포스트모던 사상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선교적 신학은 (1) 타자에 열려 있고 헌신되어 있으며 (2) 토대를 넘어서고 (3)총체성에 대항한다. 142.
포스트모던 담론의 관심사를 따라, 상호 문화적 해석학과 선교적 신학은 차이와 다양성을 기리기 위해 이성의 전체화하는 힘에 저항하면서, 타자의 증언에 계속 열려 있고 헌신되어 있는 것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선교로 인해 바르게 형성된 신학의 형식들은 기독교적 증언이라는 과업에서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개방성과 헌신을 통해 계속해서 특징 지어질 것이다. 이는 삼위일 체 하나님께 신실한 모든 형태의 기독교 담론을 지배하는 사랑의 원칙에 부합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타자를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세상 속으로 확장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타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신학의 실천에 아주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적 순응의 위험에 저항하고 복음의 풍성함을 알고 증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자의 증언에 열려 있어야 한다. 147
타자와 함께 성경을 읽는 것은 근본적 맥락성에 대한 신념을 요구한다. 그러한 신념이 없는 성경 읽기는 대개 식민지화의 일부분인 강압적인 설득과 동화라는 관행으로 넘어가고 만다. 상호 문화적 해석학과 선교적 신학의 관점 에서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이며, 따라서 총체성에 저항하는 비토대론적 자세와 더불어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헌신을 통해 다원성에 대한 지지와 번영에 헌신한다.157
우리는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타자와 함께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과 하나님 사랑의 풍성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 이 선교적 신학의 과제다. 158.
6장 선교적으로 구약성경 읽기
선교적 해석학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그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에 보여 준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166
구약성경이 야웨의 유일무이성을 확증하기 위해 언급하는 야웨의 가장 위대한 네 가지 ‘역할’을 눌랍게도 신액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확증 할 때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야웨만이 홀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민족의 심판자이시고, 그에게로 돌아서는 모든 민족의 구원자시다. 동일한 우주적 진리가 신약성경에서 어려움 없이 예수님에게서 확증된다. 168
7장 선교적 신명기 읽기
선교는 모든 창조 세계와 화해를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목적에 사로잡히기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회중 공동체-그리스도의 회복적 통치의 표지, 도구, 선취로서 성령에 의해 살아가는 공동체-가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선교적 해석학은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것을 인식한다.187
선교는 일차적으로 가는 것이나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존재하는 것이다. 또렷이 구별되는 백성으로, 민족들 사이에서 대항 문화적…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200
선교는 언제나 상황화되었고, 상황화되어야 한다. 최고의 선교와 신학은 어떤 면에서 언제나 갱신되고 재발명되고 있다. 문화와 선교적으로 만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것이든 현재 우리 자신의 공동체에서 살아 내는 것이든, 앞서 왔던 전통에 근거하는 동기에 대담하게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고,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이야기의 새로운 표현을 수용하기를 불사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선교 지도자는 진정성 있는 선교의 표현이 아주 별나게 보이거나 교회의 전통적 구조의 주변부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민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 이야기에 뿌리내리고 있을 것이다. 214
8장 선교적 시편 읽기
야웨가 다스리신다는 선언은 충성 서약의 하이라이트이며, 이 시의 심장이자 중심이다. 제임스 메이스(James L. May)에 따르면, "주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나라가 예배하는 신들이 다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신의 왕권을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며, 다른 신들의 통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248
시편 67편과 96편은 중요한 선교적 주제들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두 시편의 핵심 기조는 모든 창조 세계와 거기에 거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열방을 다스리시는 야웨의 왕권이다(67:4; 96:10). 이러한 강조는 필연적으로 두 시편 모두에서 빛을 발하는 포용주의로 귀결된다. 251
9장 선교적으로 신약성경 읽기
신약성경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종교적' 길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새롭고 쉬운 길을 제안하는 것 역시 아니다. 중세 교회와 연옥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한 질문에 다른 답을 주기는 했지만) 그 틀을 유지했던 종교개혁가들과 그 후계자들 때문에, '천국에 가는 방법'은 신약성경을 읽을 때 중심 모티브가 되어 왔다. 미국 문화에서는 특히 그랬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잘못된 틀 인 것 같다. 신약성경은 재림과 최종적 나라의 최종적 도래에 앞서, 이미 지 금도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되찾고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261)
신실한 신약성경 해석학은 하나님이 부여하시고, 예수님이 형성하셨으며, 성령이 이끄시는 선교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교회를 지탱하고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264)
신약성경에서는 우리가 공공 선교적 신학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것이 탄생했다. 신학은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아주 특별하고 성스러운 소수를 위한 사적 공간으로 후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신학은 세상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해석학적 공간을 여는 것이어야 한다. 이 새로운 해석학적 공간은 우리와 우리가 공유하는 주님을 하나로 묶어 주는 새로운 '렐리기오'(religio)를 가지고 예배와 친교 안에서 다함께 살아가고, 새로운 '폴리스'로서 다함께 기능할 때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단지 그것의 수혜자가 아니라 대리자로 부름받는다. 이 새 창조의 대리자가 될 때, 우리는 오늘날 다른 많은 사회와 문화가 열망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실재를 제공할 수 있다.(281)
10장 선교적으로 야고보서 읽기
야고보서는 독자를 하나님의 선교라는 성경의 내러티브 안에 어떻게 위치시키는가? 야고보서는 독자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이들로 어떻게 형성하는가?(286)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성경을 읽으신 방식,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교를 대표하신 방식, 예수님이 신실함을 평가하신 방식. 바로 이런 것들이 야고보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채우며, 그의 청중이 세상을 개념화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형성한다.
(299-300)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특징적인 관습은 무엇인가? 누가 결정하는가? 문화적 적응이 적절한 때는 언제이고, 길을 잃어버리는 것, 즉 배교와 변질로 이어지는 암 덩어리가 될 때는 언제인가? 표준적 관습, 신의, 관행이라는 끊임없이 쿵쿵 울리는 드럼 소리는 다른 종류의 드럼 연주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이들의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어도 또 다른 리듬을 듣고 따라갈 가능성을 열어 둔다는 의미다.(305)
유배지에서의 신실함이란 다른 방향을 택하여,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복음을 마찬가지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물인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체현함으로써 그 사람의 존재와 행동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308)
11장 선교적으로 골로새서 읽기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에 의해 어둠의 지배에서 해방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생명의 충만함을 증언하며,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감사함으로 참여한다. (342)
선교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복음 그리고 바울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승들이 성경 본문 안에서 상황화되는 방법과 교회가 오늘날 그들 자신의 상황에서 바울의 인도를 따라갈 방법 모두를 진지하게 여긴다. 한편으로 상황 안에서 신학을 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규범적 복음의 분명한 시작을 유지해야 한다. "변함없는 복음과 변화하는 상황 사이에서 추는 신학의 춤에서는 복음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344)
선교적으로 골로새서를 읽는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 서신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선교를 어떻게 증언하는지,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들이 그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퉁이에서 그 선교에 참여하도록 어떻게 요청하는지 이해하기를 추구한다.(347)
12장 선교적 성경읽기와 설교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교의 기록이자 도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선교적 사명을 위해 형성하고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임을 인식하는 것이 설교의 임무에 필수적이다.352
선교적 설교는 단지 믿음 안에서 자라고자 하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속된 개인들에게 구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구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362
선교적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을 문화적 우상숭배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의 참된 이야기로 초대하며, 우리를 문화적 우상숭배의 힘에서 해방시켜서,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예수님을 전함으로 세상을 위해 구별된 백성을 형성한다. 363
13장 선교적 설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복음 중심적 설교-무엇이 다른가?
선교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하는가? 382
선교적 해석학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해, 하나님의 세상과 씨름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를 보여 준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383
선교적 성경 읽기의 해석학적 틀은 "모든 지형을 '보는 방법, 그것을 통과하는 길을 찾아내는 방법, 가장 중요한 것을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선교적 읽기의 지도는 하나님의 선교에 맞춰진 성경 이야기의 근본적 방향성을 볼 수 있게 하고, 그 이야기의 주요 특징이 분명하게 두드러지도록 하며, 다른 많은 특징과 그러한 주요 줄거리 사이의 유익하고 놀라운 연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398
우리의 설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모든 것에 대한 많은 이미지와 포괄적 함의의 풍성함을 탐구하고자 애써야 한다. 이러한 설교는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해 하나님의 세상과 씨름하면서 하나 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형성되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407
14장 신학교육을 위한 선교적 해석학의 함의
선교적 해석학의 신학과 실천은 본문 해석이 회중 공동체(gathered communities)의 형성을 도움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질 수 있도록 성경을 엄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에 초점을 둔다.
(411)
사도들의 선교는 일차적으로 그들을 존재하게 한 구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해서 증 언하도록 모이고 보냄받은 공동체들을 형성하는 것이었다.(416)
선교적 공동체의 실천은 선교적으로 해석된 성경 말씀을 세상 안에서 그들의 존재와 행함과 말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증인 공동체는 선교적 해석학에 의해 형성된, 그렇기에 성경에 충실한 교의학이라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이러한 신학적 길잡이는 공동체가 세상으로 보냄받을 때 불가피하게 제기될 질문들과 씨름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준비시킬 것이다.
우리의 소명에 합당한 행실은 무엇인가?
회중 공동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이웃을 어떻게 돌보는가?
그 공동체는 인생살이의 어려운 도전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나님의 포용적 사랑을 환대 안에서 어떻게 드러내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논쟁하고 일치를 위해 분투하는가?
공동체의 자원은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재산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무슬림, 불교 신자, 힌두교 신자인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이러한 실천의 문제들은 사실 섬김으로 표현된 신학이다.(425)
15장 신학 교육과 교과 과정을 위한 선교적 성경 읽기
브레바드 차일즈는 성경신학 운동에서 합의된 의견 중 세 가지 주요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신학적: 성경의 주인공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2) 내러티브 통일성: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모든 성경과 그 속의 사건은 이러 한 내러티브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3) 역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그의 강력한 행동들에 의해 드러난다.(433-434)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언제나 성경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우리가 던지는 그 질문이 우리가 얻는 답을 통제할 것이다." 우리의 방향성을 성경의 본질과 목적에 신실하게 맞추는 기본 질문은 이것이다."이 본문은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선교적 증언을 위해 어떻게 준비시키고 형성했으며,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는가?"(451)
뉴비긴은 조직신학의 임무가 "각 세대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진술하고, 신앙을 해치는 오류들을 드러내어 격퇴하며, 신앙을 왜곡시키는 교리를 교회의 몸에서 몰아내고, 각 지체를 온전하고 선명한 신앙의 이해로 이끄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신학은 적극적 임무와 소극적 임무를 모두 갖는다. 교회를 살아 있고 역동적인 신앙으로 이끌도록 디자인된 새롭고 적실성 있는 신앙의 진술을 내놓는 것, 그리고 진리를 왜곡하고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문화적 우상숭배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보호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안을 다루고 밝혀 주는 신학만이 교회를 그 선교적 소명을 위해 준비시킬 수 있다.
(456-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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