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탈주술화 (Decapitation)
왜 근대적 자유는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을 통해, 혹은 그 질서로부터 우리 스스로 끊어져 나옴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근본적 반성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일인칭의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주된 관심이 사물 자체, 혹은 그 속의 진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의식하는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리하여 일인칭 관점은 다른 무엇보다 내 앞에 나타남, 곧 자기 현전의 확실성을 특징으로 가지며, 이것은 무엇보다 진리를 확인하는 장소로서 나의 내면이 중요하게 대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작된 근본적 반성성의 태도는 일종의 내면화(inwardness)로 볼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데카르트의 근대적 자아관이 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이룬 내면화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룬 내면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플라톤에게 실재는 본질적 세계, 즉, 위에 있는 것이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께(위) 가기 위한 여정으로 내면화의 개념을 제시하였다면, 데카르트의 내면화는 외부와의 단절 속에 확실성의 근거를 내 '안' 에서 찾겠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종교개혁 이후의 혼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환, 신대륙 발견 등 매우 혼란스러운 격동기에 살았던 수학자 데카르트에게 도대체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매우 절박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확실하고 자명하다고 믿어왔던 전통이나 지식, 세계의 붕괴를 경험한 데카르트가 '확실한 지식'의 정초를 찾고자 씨름한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_ 박은주, 35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를 특징짓던 확실한 지식이나 보편적 이성, 합리성과 같은 본질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성적 주체, 혹은 보편적 존 재'와 같이 근대 이후를 휩쓸었던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근대적 자아관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이성 중심의 본질적 자아관은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 맥락적이고 가변적인 측면들을 간과함으로써 인간자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오히려 제한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자아는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자아는 단지 신념과 욕구들의 집합이며, 그 집합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기에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37
칸트는 "우리의 경험적 인식조차도 인상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 자신의 인지적 힘이 그 자체로부터 제공하는 것으로 구성되는 복합체일지도 모른다"이라고 함으 로써, 우리가 바깥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범주, 즉 아프리오리의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다."" 칸트의 주장은 이성의 검토를 통해 인간의 의식에 재현된 세계만이 확실한 지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의식의 재현조차도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인식의 범주 내에 파악될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한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이와 같은 칸트의 주장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것을 구성해낼 수 있는 인식의 조건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이후의 인간의식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출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의 사상적 변천을 거치면서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에 대한 완전하고 과학적인 설명을 하나의 이상으로 추구하는 지배적인 문화전통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흐름은 '근대(modernity)'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43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세계 및 지식은 더는 '실재에의 일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회적 구성 으로서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진리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설명방식이 얼마나 '정합성'(coherence)을 가지느냐의 문제이다. 따라 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지식은 사물 자체의 본성이나 인간 마음 안의 재현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한 인간들의 상호작용으로 강조점을 옮기게 된다. 다시 말해, 포스트 모던 시대에 지식은 더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의 협상 속에서 합의된 하나의 해석으로 간 주될 뿐이다. 45
그것이 진실인가? 아니라 그것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식경제의 맥락에서는 그것은 잘 팔리는 것인가?로 제기 되고
권력확장의 맥락에서는 그것은 힘이 있는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 가르침의 의미가 희석되고, 가르침의 활동이 위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가르침의 근본 조건으로 여겨졌던 자아와 세계가, 포스트모던 시대 철학자들에게는 해체되어야 할 두 가지 토대로 배격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교육에서 자아와 세계는 '인간이 된다.' 라는 것의 핵심적 의미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칸트가 『교육론(On Education)』에서 교육을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정의한 이래로, 교육의 목적은 학생을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칸트 이후의 교육사상사는 이와 같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대립되는 관점의 역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티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로티의 진술은 다소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상정해왔던 자아관과 세계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인간의 본질로 여겨졌던 '이성'의 경우, 그것이 인간의 본질 로 여겨졌기 때문에 교육에서도 '합리적 이성의 인간'을 목적으로 하여 그러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간에 대한 규정은 감정이나 감각, 신체 등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합리적 이성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인간을 서열화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사람의 고유함과 다양성이 무시되고, 교육은 외부에서 정해진 목적에 따라 획일화된 인간을 양산해내는 형태 를 면치 못했다.
=> 누가 그렇게 획일화된 인간을 양산해내는가?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규정할 때뿐만 아니라 감성, 인성, 도덕 등 여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여 인간의 본질을 배타적으로 규정할 때는 우리가 언제나 빠질 수 있는 오류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로티의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로티는 어떤 배타적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때 그 배타성에 내재한 억압과 폭력의 기제를 거부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존의 문제, 죽음의 문제, 인간의 잔인함) 51
포스트 모던 사회 속에 더 가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그 가치 기준을 정하는가? 정하는 것(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교육적 작업은 자아와 세계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 속에서 적절한 시점을 찾아가는 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외의 모든 해결책은 교육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시도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54-55
홍원표에 의하면, 이와 같은 회의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주의적 본질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다원성을 정당화하고 있으나, 이 역시 다원성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본질주의, 즉 '반본질주의적' 본질주의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인간본성론에 기반을 둔 근대성의 존재론적 가정이 인간존재의 다양성과 차이를 간과했다면, 인간존재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관은 그와 같은 다양성을 가져오는 인간본연의 존재론적 특징을 의도적으 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적 인간관이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까지 함께 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5
아렌트는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마치 본성처럼 모든 인간존재에 공통적인 속성으로 들어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아렌트의 인간다움이란 인간다운 삶의 양식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렌트의 관심은 인간다움의 의미를 인간의 본성 속 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속에서 탐색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본성이 아닌 인간의 조건으로의 전환은 몇 가지 특징적인 의의가 있다. 첫째로, 인간에 대해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정이나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가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나라는 존재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부터 출발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인간의 삶 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인간의 실존을 조건 짓는 성격을 가지게 되며(HC: 58), 나라는 존재는 실지로 그러한 관계의 영향을 받기 때 문이다.
둘째로, 아렌트는 "인간은 조건 지어진 존재'(HC: 59)라는 양면적 측 면에 주목한다. 인간이 조건 지어진 존재라는 아렌트의 명제는 "인간은 조건을 만들지만" "만들어낸 그 조건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라 는 조건의 양면성에 대한 통찰에 의한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은 제약성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조건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한편으로는 근대의 인간에 대한 본성적 접근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해체적 접근에 대한 아렌트식 대응으로도 보인다. 즉, 인간 은 주어진 세계의 조건 속에 놓인 수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 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구성해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사회적 조건을 구성하고 만들 수 있는 능동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 속에 태어나서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 지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67
“내가 나의 삶을 통해 이룰 시작은 그 누구의 시작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_ 한나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한다. 76.
반교육학은 교육에서 세계를 가르치지 않는 방식의 가르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저히 아동의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와 관심, 흥미를 기반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몰렌하우어에 따르면, "전수할 것이 없는 자에 게 교육의 과제는 단지 아이들과의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교육관에서는 "미래에의 의지가 소멸되고, 내용적인 의미의 기획이 빈곤해지며, 잘못된 보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교육 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고 아이들과 단지 친구처럼 지내는 것'으로 만족 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117
얀 마스켈라인
Jan Masschelein
short biography
Jan Masschelein is a full professor at the Faculty of Psychology and Educational Sciences, staffmember to the Laboratory for Education and Society. He studied Educational Sciences and Philosophy at the KU Leuven and at the Johan Wolfgang Goethe Universität in Frankfurt am Main and is a Fellow of the Alexander Von Humboldt-Stiftung. Primary areas of scholarship are educational philosophy and theory, critical and social theory. Current research concentrates on the (defence of the) public role and character of schools and universities, on the design of ‘learning cities’, on a contemporary pedagogical approach towards emancipation and work, and on “mapping” and “walking” as research practices. He has been engaged with architects/artists in the development of experimental educational practices and in the elaboration of collective experiments with students.
His research lies within in the broad field of educational philosophy and theory, critical theory, social philosophy and governmentality studies. The research specifically deals with the public and societal role of education (both in schools and universities), the changing experiences of time and space in the age of the network, the pedagogical meaning of cinema and camera, school architecture and a pedagogy of attention. A significant portion of his attention is also dedicated to experimental pedagogical practices and to new forms of documentary and exploratory research.
짧은 약력
얀 마셸라인은 심리학 및 교육과학 학부의 정교수이자 교육 및 사회 연구소의 직원입니다. 루벤 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요한 볼프강 괴테 대학교에서 교육 과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펠로우로 활동 중입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교육 철학과 이론, 비평 및 사회 이론입니다. 현재 연구 분야는 학교와 대학의 공적 역할과 성격, '학습 도시'의 설계, 해방과 일에 대한 현대 교육학적 접근, 연구 실천으로서의 '매핑'과 '걷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건축가/예술가들과 함께 실험적인 교육 관행을 개발하고 학생들과 함께 집단 실험을 정교화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교육철학과 이론, 비판이론, 사회철학, 정부성 연구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특히 학교와 대학에서 교육의 공공적, 사회적 역할, 네트워크 시대에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 영화와 카메라의 교육적 의미, 학교 건축과 주의력 교육학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험적인 교육적 실천과 새로운 형태의 다큐멘터리 및 탐구적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생명에 대한 책임은 가정이라는 사적영역에서 담당했다. 즉 가정은 아이들이 잘 자라갈 수 있도록 경제적 활동을 통해 먹고사는 일을 책임지고, 바깥의 위협으로부터 아이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을 지녔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세계 속으로 안내할 책임이다. 세계 속으로 안내됨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의 고립된 자아로부터 빠져나와 이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를 알고,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에 연결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을 세계 속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른 세대에게 세계를 보다 가치 있고 아름다운 곳으로 존속해서 새로운 세대에게 안내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은 전통적으로 공적영역과 관련된 책임 이었다. 즉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의 세계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지를 논의하던 곳이 공적영역이었다. 아이의 생명에 대한 책임과 이 세계에 대한 책임, 이 두 가지 책임은 어른 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담당해야 할 교육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155
우리의 희망은 언제나 각 세대가 가져오는 새로운 것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오직 새로운 것에만 두고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것을 통제하고 우리, 즉 헌 것이 새것은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된다. 모든 아이가 지닌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위해서라면 교육은 보수주의적일 필요가 있다.
교육은 이 아이가 담지한 새로움을 보전해 새로운 것으로서 낡은 세계에 소개해야 한다. 세계는 그 행위가 얼마나 혁신적인가와 관계없이, 차세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언제나 낡아빠지고 파괴 일보 직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CE: 259) 교육의 위기
내용 자체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방해 세계를 새롭게 재현해내는 태도 즉 교과를 죽은 테스트가 아닌 살아있는 힘으로 읽어낼 수 있 는 새로운 안목과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경우 전체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플라톤의 텍스트를 통해서도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그 속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을 형성한 사람이 최신 유행하는 텍스트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보다 이 세계와 더욱 유의미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_ 180.
아렌트는 활동적 삶과 정신 적 삶을 명확히 구분되는 다른 중류의 활동으로 본다. 내 안의 내적 때 화를 위해서는 일상으로부터 물러남, 다른 활동의 중지가 필요하다고 다. 사유한디는 것은 일상의 하던 일을 중지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멈춰서서 생각할 여유"(LM: 18)를 가지는 것이라고
도 한다. 우리가 현상세계 속에 타인들에게 매몰되어 하던 일을 멈추고 나 홀로 생각할 여유를 가지는 것, 일체의 분주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남이라는 적절한 고덕(solitude)을 요청하는 것이다. 187.
페넬로페의 뜨개질, 혹은 사유의 바람이 계속 지나가면 가시적인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 모종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쌓이면 사유가 사람의 마음의 결, 즉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고유한 인격을 특징짓는 독특함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3.
아렌트는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를 탐색하기 위해 권위는 무엇이였는지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권위라는 용어의 원천은 로마의 역사적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의 경험에서 권위가 교육적 성격을 획득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조들을 뒤따르는 세대에게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위대한 자들, 즉 마이오레스(maiores, 선조)라고 생각할 때뿐이라고 한다. 이때에만 서로 다른 세대가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앞 세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들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로마의 권위 개념이 출현한 것은 로마의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작과 관련되어 있다. 도시로마를 시작한 건국의 신성한 토대를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것이 원로원의 핵심 기능이었고, 원로들이 권위의 중심에 있었던 데서 권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우토크리타스(aurocricas; 권위, 존경, 명망, 영향력)라는 말은 '증가 시키다, 확대시키다, 성장시키다, 촉진시키다'를 의미하는 동사 augere로 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권위를 부여받은 원로원의 구성원들은 시작의 토대를 놓았던 선조들, 즉 마이오레스(maiores)로부터 전통을 전해 받는 방식으로 권위를 부여받았으며, 이들은 그 토대를 물려받아 그 토대를 더 중대(성장) 시키는 자들이었다. 권위는 한 공동체를 시작한 자들로 부터 전수된 것으로서. 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지속해서 공동체의 유지와 새로운 창설을 통해 공동체적 토대를 증대시켜 가는 자들인 것이다. 214-215.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적영역의 관점에서 볼 때, 교사와 학생이 맺는 교육적 관계는 공동의 세계를 돌러싼 인간들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관계로부터 우선 도출되는 특징은, 교사와 학생이 맺는 교육적 관계는 세계를 중심으로 맺어지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교육적 관계는 친구 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 혹은 공급자와 소비자로 특징되는 경제적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이 부각된다.
이것은 교사가 학생들 앞에 설 때 언제나 세계를 책임지는 자로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사가 학생들을 마주할 때,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줄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사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무엇인가가 그 손에 들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세계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이 학생들 앞에 선 교사이며, 다른 직업과 교직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세계를 책임진 교사의 태도로 인해 권위가 생긴다고 한다. 다르게 말해 세계로부터 부여되는 교사의 권위는 교사 자신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세계를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안내할 때, 그것 이 학생들 마음을 움직여서 학생들 스스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세계를 매개로 한 교육적 관계는 평등한 성인들 간의 정치적 관계와는 구분되는, 어른세대 자라나는 학생세대의 선이 분명히 존재하는 비대칭적 세대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231-232.
교사가 자신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 는 것을 열정적으로 열어 보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학생이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하는 교사가 소중하게 열어 보이는 그 세계 속에, 무엇인가 중요해 보이는 것이 얼핏얼핏 보이고, 무엇인가 좋아 보이는 것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갈 때, 그것이 학생들 안에 바람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 바람은 교사도 학생도 전혀 기대치 않았던 선물처럼 학생에게 불어와서 학생 안에 전율을 일으키고, 그 마음 한편에 스스로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바람이 지나갔는지 모르지만 학생 자신은 알고 있다. 그것이 아름다운 위험으로서의 가르침의 선물이다.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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